빌런이 도주하는 걸로 이야기는 시작돼. 그리고 그 빌런을 쫓는 건 붉은 망토를 걸친 히어로야. 탄탄한 근육이 그대로 보이는
타이즈는 정통파 히어로였는데, 조금 촐싹맞게 달려가지만 파쿠르를 하는지 장애물에도 걸리지 않고 슉슉 나아가. 거리가 점점 줄어드는
걸 보면 빌런은 곧 잡히겠지. 대피하던사람들은 그걸 보며 레드가 왔으니 안심이라고 이야기 해. 분명 방송에서도 이제 곧 빌런은
레드에게 검거되고, 도시의 평화는 지켜질 거라는 이야기를 신나게 떠들어대고 있겠지.
빌런은 그런 상황이 정말 마음에 안 들었어. 저 레드라는 촐싹이한테 당한 친구들을 생각하면 더 기분이 나빠. 기껏 몇 중으로
계획을 세워놨더니 어떻게 알았는지 중요 멤버들만 귀신 같이 체포해서 계획을 초쳤거든. 부글부글 속이 끓었지만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을 찾으려고 주변을 매의 눈으로 살폈어. 그러다가 미처 대피하지 못하고 혼자 놀고 있던 여자아이를 발견했어. 쟤를 이용하자.
짜증나긴 하지만 레드는 정의롭고, 인질을 허투루 대할 히어로는 아니었기 때문이야.
빌런은 붙잡은 여자아이를 옆구리에 끼고 달리기 시작했어. 순식간에 낚아채서 높은 곳까지 올라갔더니, 아이는 그 사이에 기절한 모양이야. 조용하고 반항도 안 하니 차라리 편하게 됐다며 빌런은 도주에 집중해.
그리고 레드가 빌런을 바로 붙잡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빌런이 인질을 스스로 포기하도록 몰아가려고 할 걸 잘 아니까 조금씩
여유가 생겨. 직접 공격당하지 않기 때문에 일단은 도망을 가면서도 딴 생각을 하게 된 거지. 도주에 성공하면 좋겠지만, 아마 그건
힘들 것 같거든. 그럼 하다못해 저 망할 영웅 양반한테 좆될 선물 하나 쯤은 챙겨주고 싶어진단 말이야. 빌런은 레드가 초쳤던
계획을 위해 준비했다가 써보지도 못했던 함정을 기억해냈어. 그런 공작이 특기였던 빌런 친구는 이미 잡혀갔지만, 그 녀석의 의지는
남아있었지. 레드 측에서 시설을 다 파괴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숨겨진 게 하나 더 있었거든.
하하, 좆돼봐라, 레드!
빌런은 그렇게 생각하며 거의 폐허가 된 빈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어. 그곳 위에 인질인 여자애를 던져두면 레드는 제 발로
걸어들어오게 될테니까. 레드는 사지가 될 걸 아는지, 조심스럽지만 망설이지는 않는 걸음걸이로 빌런을 뒤따라 들어왔지.
빌런은 장치의 기동 버튼을 확인하고, 여자애를 레드에게 던져주었어. 그리고 여자아이를 받아든 레드는 자신의 온몸과 망토로 감싸고 충격에 대비했어. 특수처리된 슈트와 망토라면 아이를 지켜줄 수 있을테이까 망설이지 않았지.
예상대로 큰 충격이 건물을 뒤흔들었어. 온몸이 뒤틀리는 것 같은 고통을 견디며 여자아이를 감쌌던 레드가 겨우 고개를 들었을
땐, 자폭 공걱을 한 빌런은 온몸이 처참하게 비틀린 채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있었어. 살아날 가능성은 없어 보였지. 그리고 레드
역시 온몸이 만신창이였어. 슈트며 망토는 엉망으로 찢기고, 얼굴을 가려주던 헬멧은 부서졌지. 그래도 괜찮아. 얼굴을 타고 흐르는
피를 훔쳐내고, 레드는 조심스럽게 망토 안을 들여다보았어. 아이는 다친 곳 없이 망토 안에서 소리 죽여 울고 있었어. 레드는 그런
아이에게 다정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어.
이제 괜찮아.
우는 아이를 차분하게 달래자, 아이는 안심했는지 다시 잠들었어. 레드는 슈트의 자체수복 기능으로 서둘러 헬멧만 고쳐 쓰고, 아이를 소중히 망토에 감싸 안은 채 건물 밖으로 나왔어.
폭발음에 쫓아온 경찰, 소방관들에게 레드가 말했지. 아이는 무사합니다. 혹시 모르니 어서 병원에 데려가 주세요. 엠뷸런스가
아이를 싣고 달려나가는 걸 확인한 후에, 레드는 경찰에게 상황을 설명해주었어. 빌런이 자폭했고, 자신은 슈트 덕분에 무사했지만
빌런은 죽은 것 같다고 이야기했지. 그리고 누가 봐도 멀쩡한 상태가 아니어 보이는 레드를 데리러 온 히어로 전용 엠뷸런스가
도착해.
감사합니다, 레드. 부축해주며 상황을 들은 경찰이 레드에게 인사를 했어. 레드도 고개를 정중하게 숙이며 대답했지. 찬만에요.
당연한 일을 한 건데요. 뒷일만 맡기고 가게 돼서 미안해요. 그 대답에 감동한 경찰은 걱정하지 말라며 어서 치료하러 가라고
레드를 엠뷸런스에 태워 보냈어. 그리고 기자들에게 "그는 정말 히어로 중의 히어로예요."하고 인터뷰를 하겠지.
달리는 엠뷸런스 안에서야 레드는 안심하고 헬멧을 벗어. 허니블론드의 머리카락이 피에 젖어 있는 것을 수건으로 닦아주던 청년이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보고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해.
다행이네요, 회장. 얼굴에 상처는 안 났어요. 내일 촬영있는데.
헬멧 안에 숨겨져 있던 얼굴은 놀랍게도, 요즘 길거리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유명인이었거든.
레드씨는 아마 이런 느낌의... 왕자님 같은 외모... 였던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