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자(not스카라무슈)는 차경의 저택에서 눈을 떠서 이나즈마를 방랑하기 시작했겠지... 오히려 이때의 이나즈마를 떠돌던 가부키모노가 스카라무슈의 행적과는 모순되는 '인형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여러 텍스트들의 묘사'에 어울릴 거 같기는 함... 여튼 그 과정에서 종교적인 깨달음을 추구하는 어떤 수행자와 인연을 맺은게 아닐까? 그리고 그 수행자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을 찾기 위한 수행을 권유받거나,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찾아야 함'에 대한 조언을 들었을 것 같음. 삿갓을 계속 쓰는 것도 그에게 받았던 삿갓을 계속 쓰고 다니던 것이 습관처럼 남은 것이고, 존대를 쓰게 된 것도 그의 말투를 따라한 거라든지...
이런 건 어떨까?
수행자와의 첫만남도 비오는 날이었을 것 같다. 삿갓도 비옷도 없이 쏟아지는 비를 모두 제 몸으로 받으며 걸어가는 기이한 소년을 본 수행자가 자기가 비를 피하고 있는 곳으로 불러서 자기가 쬐고 있던 작은 모닥불에 옷이라도 말리며 비가 그치길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붙잡으면 소년은 순순히 수행자의 곁에 앉아주겠지. 인간의 선의에는 선의를 돌려주는 인형이니까... 그렇게 밤새 내리는 비를 함께 피하며 수행자는 명상에 잠기고 소년은 정좌하고 앉아 몇 시간이고 수행자를 바라보고 있었을 것 같음. 그리고 결국 말을 거는 건 방랑자 쪽이 아닐까? 자신처럼 휴식, 수면, 식사 같은 행동에 대한 필요가 없는 인형도 아니면서 무엇도 하지 않고 눈을 감고 앉아 있기만 하는 인간이란 정말 신기하고 궁금한 존재였을 것 같아서.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거야?"
"......깨달음을 얻기 위한 명성을 하고 있어요."
"깨달음?"
"네. 무엇이 저를 속박하고 있는 지를 깨닫고, 해탈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저를 찾고 있어요."
"해탈이 뭐야?"
"해탈이라는 것은..."
그렇게 수행자에게 많은 것들을 물어보다가, 수행자의 대답을 들으면서 점점 단순한 궁금증이 아니게 될 것 같다. 중요한 것이 결여되어 모든 순간 그것을 갈망하게 되는 자신도 '깨달음'을 얻으면 '해탈'해서 '자유'로워 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스스로 이야기를 꺼내고 말 것 같다. 절박하게 물어보는 소년에게 수행자는 고개를 끄덕여줄 거야. 깨달음을 얻는 것에 자격이란 없으니까. 이 신기한 소년에게도 그만의 사정이 있을 것이고, 그 사정에서 오는 번뇌들로부터 자유로워질 권리가 있을 거야.
"나도......너처럼 수행자가 될 수 있을까?"
"모든 존재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수행자예요."
"모든 존재는 수행자......"
"모든 이에게는 이미 깨달음이 있고, 저희는 그것을 찾아가는 거예요."
그러게 말한 수행자는 슬슬 비가 그친 것을 확인하고는 생각에 잠긴 소년보다 먼저 길을 떠나려고 몸을 일으키겠지. 그러다가 본래는 자신이 쓰고 다니던 삿갓을 소년에게 건내줄 거야.
"이 삿갓이 당신의 가는 길에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줄 거예요."
삿갓을 받아 든 소년은 서둘러 자신도 몸을 일으키며 말할 거야.
"...감사합니다......"
수행자에게 물들듯이 순백의 소년은 이제 존대를 쓰게 될거야. 그리고 스스로를 수행하는 '방랑자'라고 자칭하며 티바트를 몇백년 동안 돌아다니게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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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이걸 떠올린 이유는
방랑자의 전생과 내생의 성격 차이에 대한 것과
그 둘을 동일인물로 봐도 되는가에 대한 것과
둘의 차이가 있기에 현재의 전생의 기억을 찾은 방랑자가 물렁해진 느낌이 있는 게 아닌지에 대해서
혼자 꽂혀가지고 고민했기 때문에...
중간장 얘기) 방랑자에게 있어서 「세계에서 지워진 가부키모노, 쿠니쿠즈시, 스카라무슈에 대한 기억」이 전생의 기억이라는 감각으로 다가온다면 (더보기) LI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