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상의 할아버지임. 나의 기억도 죄다 가상임. 저는 저런 어린이가 아니었어요.
할아버지 두 분 다 나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셔서 뵌 적도 없는데 꿈에서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나를 위해 만들어놨던 마법의 밭 보고 오열하다가 깼다...
꿈속에서 나는 어릴 적 공주님처럼 드레스같은 치마를 에쁘게 차려입는 걸 좋아하던 여자애였는데 할아버지는 그런 내가 예뻐서 못참겠다는 듯이 엄청나게 좋아해주셨거든
할아버지는 농부셔서 밭에서 일을 하셨는데 나는 그런 할아버지 따라서 같이 밭에 가는 걸 좋아했음
그치만 나는 산등성이에 있는 비탈진 길을 오르거나 흙길을 걸으면 엉망이될 옷을 차려입고 할아버지를 따라가고 싶어했음...
옷이나 신발 더러워지는 것보다 좋아하는 할아버지랑 그냥 같이 있고 싶어서 같이 간다고 후다닥 뛰쳐나오면 할아버지가 합박웃음
지으면서 나를 품에 꺼안고 밭까지 올라가서 나를 위해 만들어 준 그늘 아래 평상에 앉혀주셨어. 그 평상에선 할아버지 밭도 다
보이니까 할아버지거 열심히 일하시는게 보여서 참 좋았거든
어린이의 기억에 할아버지는 마법사처럼 밭을 일구셔서 좋아했던 기억이 나. 할아버지는 우리만의 비밀이라고 씨익 웃으셨고, 나는
어른들처럼 비밀을 가지게 된게 마냥 좋아서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했어. 내가 공주님이고 나를 사랑해주는 할아버지가 마법사면
너무너무 멋지잖아. 그래서 할아버지가 하는 걸 더 좋아했던 거 같기도 해
그런데 내가 멀리 이사가게 되고 몇년을 할아버지 뵈러 못 갔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어. 종종 할아버지의
편지를 받으면 기뻐서 열장씩 답장했었는데 어느순간 편지가 뜸해지더니 안 오게 되고, 서서히 내가 할아버지를 그냥 좋은 추억 정도로
기억하게 될 정도로 어릴 때를 잊고 바쁜 타지의 생활에 익숙해졌을 때의 일이었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는 나한테 얘기해주시지 않으셨지만, 할아버지께서 남겨둔 유서에 나에게 그 추억의 밭을 물려주고 싶다고 남겨져있댔어 (아마도 연세도 있으시니 혹시를 대비해 미리 써두셨던 거 같다고 했어)
그래서 부모님과 친척들이랑 다 같이 할아버지 상을 치르고 그 밭으로 가봤거든. 어차피 크지도 않은 밭이고 정말 별거 없는 땅이라서 친척 어른 중에서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확실히 내가 받게 될 그 밭에 갔어
내가 앞장을 섰어. 밭에 가본게 나랑 할아버지 뿐이었어. 올라가는 내내 기분이 이상했어. 내가 기억하던 밭의 모습과 달라진게
없이 그대로였는데, 나는 처음으로 내 발로 걸어서 산길을 지나 밭까지 올라가본 거였어. 항상 할아버지가 웃으면서 나를 품에 안고
올라가셨으니까...
그렇게 올라가는데 밭 옆에 정말... 커다란 주황색 호박이... 정말 오래 자라서 늙은이처럼 표면에 자글자글하게 주름까지
생긴 정말 커다란 호박이 있었어. 나는 할아버지가 마법사였단 걸 다시 떠올렸어. 그리고 쭈욱 밭을 둘러보는데 어제까지도 할아버지의
손을 탄 것처럼 밭은 할아버지가 키운 건강한 식물들로 가득 했어. 내가 좋아하는 채소와 과일 뿐이었어. 할아버지가 "우리
공주님이 좋아하는 걸 먹을 수 있게 마법을 부렸단다."라고 내 머릴 쓰다듬으며 말해주는 것 같아서 평상에 앉았어. 남들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더워서 땀을 훔치는 척 글썽해진 눈가를 정리하려고 했거든. 평상에 앉으니까 또 기분이
이상하더라. 여기서 보는 풍경 속엔 할아버지가 있어야하는데 안 계셔서...
그런데 밭을 구경하고 있던 친척들이 신기한 커다란 호박을 살피다가 뭔가를 발견했는지 웅성거렸어. 그들의 목소리가 나한테도 잘 들렸어
"이 호박 문 달려있는데?"
"이거 안이 비었어!"
"마차다!"
"안도 화려하게 꾸며져있는데 호박 냄새는 하나도 안 나."
"어? 편지다! 뫄뫄야, 너한테 쓴 편지 있는데?"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어. 그냥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었어...
나는 어릴 때 신데렐라를 정말 좋아하는 어린이였어. 내 예쁜 가방 속에 항상 신데렐라 동화책을 챙겨다닐만큼 좋아했어. 그
이야기 속에서도 마녀가 만들어준 호박마차를 타고 예쁜 드레스를 차려입고 성으로 가는 신데렐라를 좋아했어. 멋진 마차와 예쁜 옷과
무도회장에 가는 신데렐라는 얼마나 기쁠까, 설렐까, 두근거릴까. 어린 나는 그 장면이 가장 두근거렸어. 할아버지에게도 물론 수십번
이야기했던 부분이니까 당연히 알고계셨지.
여기까지 떠올렸을 때 나는 정말로 너무 슬퍼서 꺽꺽 숨도 못쉬고 어깨를 떨며 울고있었어. 할아버지는 정말 마법사였고,
신데렐라를 동경하는 손녀를 위해서 멋진 호박마차까지 준비해놓으셨는데 난 바쁘단 핑계로 그런 할아버지를 잊은 거였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할아버지는 정말로 나를 위한 마법사였는데...
그렇게 우는 내 옆으로 친척이 편지를 가져왔어. 나한테 보내는 거라더니 우리는 이상하게 편지봉투를 열어볼 수도 없다고 말하고
내 옆에 편지봉투 하나를 올려놓고는 내 등을 토닥여주었어. 나는 그 몸짓에 더 참을 수 없이 슬퍼져서 울고 울고 또 울었어...
그렇게 울다가 깼는데 누워있던 나도 그 감정에서 정신을 못 차리겠어서 결국 좀 울고 말았다...
2021.12.18